[𝐄𝐬𝐬𝐚𝐲] 국립 국악원 국악누리 7월호, 나난 기고

[𝐄𝐬𝐬𝐚𝐲] 국립 국악원 국악누리 7월호, 나난 기고

풍류, 흐름을 온 몸으로 살아내는 것
doing에서 being으로
글 : 나난

 

1. 나는 왜 꽃을 그리고 있는가

나는 창문에 그림을 그리는 윈도 페인터로도 알려져 있다. 20여년 전 처음 창문 위에 꽃을 그리기 시작했을 때, 나는 꽃을 그리고 싶어 창문을 택했던 것이 아니었다. 사실 꽃은 핑계였고, 진짜 관심은 창문이라는 매체였다. 처음 창문 위에 그림을 그리던 그 순간, 도파민이 얼마나 터져나왔는지 감도 안 온다. 창문을 캔버스 삼아 그림을 그렸고, 한국-뉴욕-홍콩-영국을 찾아다녔다. 나는 왜 창문이라는 캔버스에 끌렸던 걸까. 창문은 안과 밖의 경계이고, 실내의 온도와 바깥의 공기가 만나는 막이고, 갤러리의 언어와 거리의 감각이 겹치는 틈이기 때문이었다. 나는 그 경계 위에 꽃을 올려두었다. 그 꽃은 그 순간 단순한 형태가 아니라, 두 세계를 동시에 품는 매체가 되었다.

동시에 창문을 찾아다니며 갤러리 밖으로 나가고 싶었던 것도 같은 맥락이었다. 완성된 작품을 액자에 넣어 벽에 거는 방식은, 작품과 보는 사람 사이에 일정한 거리가 전제한다. 반면 작품이 공공의 공간 안으로 들어가고, 예상치 못한 순간에 나의 작업을 만나게 되는 것, 그 일상의 침투가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작품이 인간의 삶 가까이에 맞닿아 있게 되는 그 감각 자체에 본능적으로 끌렸던 것이다.

롱롱타임플라워(Long Long Time Flower) 작업도 그 연장이었다. 종이 위에 그림을 그리고 한 장 한 장 오려낸 꽃들이 사람들의 삶으로 들어올 때, 표면적으로는 '시들지 않는 꽃'을 만들었지만, 실제로 만들고 싶었던 것은 그 안에 담긴 시들지 않는 마음과 기억과 관계였다. 그림으로 그려진 꽃은 그것을 운반하는 언어가 되고, 더 이상 물성이 아니게 된다는 걸 나는 알고 있다. 누군가에게는 기다림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그리움이 되고, 누군가에게는 기억이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어떤 의미에서 시스템에 대한 관심이기도 했다. 고정된 액자 안에 완성된 그림을 걸어두는 것도 응당 의미가 있지만, 나란 사람은 그 너머의 것을 찾아다녔던 것 같다. 눈에 보이지 않는 사회적 조각을 창출하는 것. 꽃과 자연을 찾는 인간의 이유만큼, 이러한 관계의 문법을 자연스럽게 품고있는 형태가 없기 때문에, 나는 꽃과 함께 오래동안 작업해 오고 있는 것 같다.


2. 막 떨어지고 있는 꽃잎의 찰나

그런데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나는 그동안 내 마음 속에 품고 있던 지점을 발현하게 되었다. 그동안 가장 충만한 순간, 만개한 상태를 붙잡아 두는 것이 시들지 않는 꽃, 그것이 롱롱타임플라워의 출발점이라 생각했다. 그런데 국립부산국악원의 창사를 읽고, 가곡의 선율을 처음 들으며, 나는 어느새 활짝 피어있는 꽃이 아니라, 막 떨어지려는 찰나의 꽃잎들에 더 많은 이야기가 있다는 것에 머물 수 있게 되었다.

만개한 꽃은 충만함으로 가득 차 있지만, 거기서 꽃잎을 하나씩 하나씩 ‘덜어내기 시작한다’의 행위의 의미는 충만함 이후에나 알 수 있는 의미이다. 막 떨어지려는 꽃잎은 아직 가지에 붙어 있으면서도 이미 다음 넥스트 스텝으로 이동하게 되는 내면화된 사유를 얻게 된 상태이다. 피어 있음과 지고 있음이 동시에 존재하는 그 순간, 기다림과 놓아줌이, 붙어 있음과 떠남이 한 가지에 있는 것이다.

꽃잎이 떨어지는 것은 열매를 향한 시작이다. 열매의 입장에서 보면, 꽃의 시듦이 곧 자신의 탄생이다. 빛과 그림자가 순서대로 오는 것이 아니라 언제나 함께 존재하듯이, 피고 지는 것도 시간적 순서가 아니라 동시에 공존함이다. 이것은 나의 작업에 대한 소화 능력이 한 걸음 더 나아간 순간이었다. 시들지 않는 꽃을 만들려 했던 나는, 사실 시듦을 두려워하고 있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그런데 시듦 안에 더 깊은 이야기가 있었다. 막 떨어지려는 그 찰나 그 경계 위에 서는 것, 그것이 내가 늘 창문 위에서 찾아왔던 것과 같은 자리였다.


3. 풍류는 바람처럼 흐른다

풍류(風流)는 바람이 흐르는 것이다. 바람은 어느 한 곳에 머물지 않는다. 조경학자 안계복은 풍류가 어느 한 곳에 매여 있는 것이 아니라 바람처럼 흐르는 것이기 때문에, 현재 자신이 살고 있는 장소나 매인 일을 떠나서 노는 것이 아니라 그 흐름 안에 자신을 두는 것이라고 말한다. 풍류(바람이 정체되거나 막히지 않고 흐르는 것) 속에는 '자유', '자연스러움', '변화', '움직임', '아름다움'의 개념들이 포함되어 있다. (안계복. 풍류의 정원, 樓·亭·臺. 『한국전통조경학회지』 2005년)

나도 늘 흐름을 만들길 원했다. 안과 밖, 꽃과 공간, 작품과 관람객 사이의 경계를 지우고, 그 사이로 무언가가 통과하게 하는 것. 완성된 형태를 고정시키는 것이 아니라, 관계 안에서 계속 변화하는 구조를 만드는 것. 윈도 페인팅도, 롱롱타임플라워도, 모두 흐름을 위한 구조인 것이다.

조선의 선비들이 자연 앞에서 시를 짓고 음악을 들으며 내면을 비우고 정돈했던 것은, 아름다움을 소비하기 위해서가 아니라 자신의 지금을 알아채기 위해서였다. 이 알아차림을 통해 무엇이 지금 나에게 피고 있고 지고 있는지를. 나는 이번 전시를 준비하면서 그 이유를 비로소 이해했다. 풍류란 인생의 흐름을 온 몸으로 살아내는 것, 풍류를 즐긴 것은 잘 놀기 위해서가 아니라 잘 살기 위한 것이다. 그것은 무언가를 하는(doing) 것이 아니라, 흐름 안에 있는(being) 것이었다.

처음 가곡의 선율을 들었을 때, 나는 그것이 왜 이렇게 천천히 흐르는지 이해하지 못했다. 한 음절이 그렇게 길게 늘어질 필요가 있는가, 라고. 그런데 어느 순간 알았다. 가곡은 듣는 사람을 기다려주는 것이 아니라, 듣는 사람이 그 안으로 들어오도록 공간을 만들고 있었다. 음과 음 사이의 여백, 숨이 바뀌는 그 찰나에 사람의 몸이 반응하고, 몸이 반응하면서 비로소 마음이 따라온다.

나의 그림도 그렇게 작동하기를 바란다. 꽃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꽃 앞에 서는 시간을 만드는 것. 완성된 이미지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라, 그 앞에 멈추는 순간을 여는 것. 가곡이 시간을 늘여 사람 안에 공간을 만들듯, 그림 꽃은 공간 안에 시간을 심는다. 국악과 회화가 전혀 다른 언어인 것 같지만, 결국 같은 것을 하고 있었다. 흐름을 방해하지 않고, 사람이 그 안에 잠시 머물다 가게 두는 것.


4. 몸이 먼저 안다

나는 지금 2년째 임상미술치료를 공부하고 있다. 신체경험치료(Somatic Experiencing)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우리가 무언가를 분석하고 설명하는 사이, 몸은 이미 그것을 감지하고 있다. 슬픔도, 기쁨, 두려움도 언어가 도달하기 전에 신체가 먼저 반응한다. 치유란 그 신체의 반응을 억누르거나 이야기로 포장하지 않고, 통과하게 두는 것이다. 몸이 알고 있는 것을 몸이 처리하도록, 그 과정을 방해하지 않는 것.

우리의 정가가 수백 년을 살아남은 이유도 이와 다르지 않다고 나는 생각한다. 정가는 감정을 직접 말하지 않는다. 그저 모란이 피었다, 달이 밝다, 나비가 날아든다, 귀뚜라미가 혼자 운다, 이런 식으로 풍경 안에 자신의 감정을 숨겨두고, 수위조절을 하면서 서서히 안전하게 은은하게 드러낸다.

임상 현장에서 나는 이것을 반복해서 목도한다. 말로 꺼내지 못하는 것을 손이 먼저 꺼낸다. 색을 고르는 순간, 선을 긋는 순간, 형태가 만들어지는 순간 내담자는 자신도 몰랐던 것과 마주치게 된다. 미술치료의 매체가 그 통로가 되는 것이다. 내담자는 자신의 감정을 미술을 통해 서서히 상징적으로 안전하게 드러낸다. 그것은 내가 전시 공간을 만드는 방식과 일맥상통한다.

이 전시에서 나는 꽃만을 보여주려 하지 않았다. 박접무처럼 꽃비 아래를 걸어보게도 하고, 춘앵전처럼 고개를 올려 달을 쳐다보게도 하고, 가인전목단처럼 모란이 꽂혀진 화준을 돌아보게도 하고 싶었다. 그리고 이 모든 꽃잎이 바닥에 이미 내려앉은 자리, 그것은 행위를 불러일으키는 무언가가 시작된 되는 자리임을 전하고 싶었다.


5. 풍류의 정원에 대하여

나는 오래도록 시들지 않는 꽃을 만들었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리고 시듦에 관한 미학 또한 함께 얘기하게 될 것이다. 내가 진짜 만들고 싶었던 것은 시들지 않는 관계였고, 어쩌면 그 시듦도 동시에 존재해야 도달할 수 있는 이야기라는 것을 알고 있다. 모든 것이 영원하면 굳이 영원성을 얘기할 필요 자체가 없어지기 때문이다.

피고 지는 것, 빛과 그림자, 슬픔과 흥, 그 모든 것이 격식 없이 한 자리에서 어우러지는 것이 풍류라면, 나의 작업은 언제나 그것을 향해 있었던 것 같다.

2026년 국악의 날을 맞이하여, 국립부산국악원이 활짝 문을 열어 〈풍류의 정원〉을 조성하였다. 전통예술의 기관이 먼저 경계 밖으로 나서는 일은, 사실 쉬운 결정이 아니다. 지켜온 것을 지키는 것과, 지켜온 것을 흐르게 하는 것은 전혀 다른 용기를 요구하기 때문이다. 국립부산국악원은 수백 년의 선율을 품고 있으면서도, 그것을 낯선 언어와 함께 놓아보는 쪽을 택했다. 그 태도 자체가 이미 풍류였다.

국악이 어렵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그 이유가 정말 국악 때문일까, 아니면 그것을 만나는 방식이 너무 좁았던 것일까. 이 정원을 찾아온 사람들은 국악을 공부하러 온 것이아닐 것이다. 그냥 꽃이 보고 싶어서 왔다가, 소리를 몸으로 먼저 받아들였다. 그 순서가 중요하다. 이해가 먼저가 아니라, 경험이 먼저였던 것이다. 국악이 다음 세대에게 살아있는 언어가 되려면, 더 많은 경계 위에 놓여야 할 수 도 있음을 시사하는 현장이다.
공연장 무대 위가 아닌 일상의 틈 사이에, 설명이 필요한 자리가 아닌 몸이 먼저 반응하는 자리에.

대중에게 조금 더 친근하게 다가가려 했던 우리의 준비와 노력을 아시기라도 한 듯, 숲에 나비가 날아들듯 남녀노소 수많은 관람객들이 이 정원을 찾아오고 있다. 누정 같은계단에 앉아 꽃멍을 즐기고, 눈물을 흘리는 분도 계셨다. 어떤 분은 꽃 앞에 한참을 서계셨다. 무언가를 읽는 것도 아니고, 사진을 찍는 것도 아니었다. 그냥 보고 계셨다. 아이들은 꽃비 속으로 뛰어들기도 하고, 고개를 들어 천장을 꽃들을 만지길 원했다. 해설이 없어도 몸이 먼저 알고, 몸이 알면 마음이 따라온다는 것을 나는 믿었고, 그것이 이 자리에서 실제로 일어나고 있었다.

꽃과 소리, 과거의 선율과 지금의 몸, 피어있는 것과 막 지려는 것이 동시에 존재하는 자리. 이 정원에 들어오는 사람들이 잠시, 'doing'이 아니라 'being'으로 그 흐름 안에 놓이기를 바란다. 어떤 직업을 가지고 무엇을 하느냐보다, 어떤 태도와 중심을 가지고 살 것인가. 일의 종류보다 어떤 마음을 가지고 일을 할 것인가. 지금 이곳에서 당신이 할 수 있는 것을 해보자. 그것만으로 충분하다. 너울너울 나풀나풀하게.